이렇게 저렇게 나의 첫 풀 마라톤이었던 2019년 춘천 마라톤을 (눈물과 함께) 마치고, 판데믹이 세상을 덮었다.
나는 재택근무와 출근을 병행하기 시작했다. 내가 퇴사계를 낸 것은 이번해 2월이라고 해도, 내 일에 현타가 온 것은 그것보다 훨씬 전이었는데 사회적 거리두기로 인해 고립된 시간이 많아지니 일에 대해 생각할 시간도 많아졌다.
하루종일 일을 하는데 뇌를 안쓰는 기분이었다. 이런 말이 좀 그렇지만 나에게 일이 너무 쉬웠다. 분명히 일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아니 많았다. 막 쏟아져내렸다. 하지만 내 기준으로 보았을 때 주어지는 일은 너무 단순한 업무였고 이 단순한 업무에 여러가지 트집을 잡아 긴 시간을 끄는 것 자체가 내 시간에 대한 모욕이라 느껴졌다. 시간이 너무 아까웠다.
당시 나는 매일을 10km 새벽 조깅으로 시작했다. 나에게 이 시간은 기원을 알 수 없는 분노를 삭이는 시간이자 어디로 튈 지 모르는 나의 충동성을 잠재우는 명상의 시간이었다. 한시간 남짓을 달리는 동안 여러 감정이 머릿속을 채운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비워졌다.
어느 날 이렇게 나를 힘들게 하는 요소들에 집중하는 내가 지겹게 느껴졌다. 그리고 내가 지금 힘든 이유는 어쩌면 정체된 채 성장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회사에서 성장할 수 있는 길이 보이지 않아 힘든 것이라면 그 성장의 길을 회사 밖에서 찾아 보자고 마음을 먹었다.
생각, 생각, 그리고 또 생각.
그러다 얼마 전 데이비드 호크니 내한전을 관람하고 나와 굿즈샵에서 이것저것 구경 했을 때 호크니 작품에 대한 책을 본 기억이 났다. 그 때가 통번역 과정을 수료하고 일 년 정도 지난 시점이었는데, 배운 내용이 더 녹슬기 전에 기름칠이라도 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바로 인터넷 서점에 들어가 그 때 보았던 책(한국어 번역판), 그리고 원서를 함께 구매했다.
책을 구매하고 나서 나는 틈틈히 블로그에 번역본을 올렸다. (저작권 이슈가 생기지 않도록 번역한 글은 비공개로 처리했다.) 이 책은 데이비드 호크니의 작품과 삶에 대한 이야기를 인터뷰 형식으로 풀어낸 책 이었는데, 개인적으로 정말 사랑하는 작가와 그의 작품에 대한 내용이다보니 지루함 없이 진짜 재미있게 읽었던 것 같다. 번역을 하는 그 한동안 회사에서 비는 시간에 틈틈히 번역을 하고, 집에 돌아와 출간된 번역판을 내가 번역한 내용과 비교해보며 하루를 마쳤다.
생각해보면 모순적인 시간이었다.
지독한 우울감으로 불면증에 시달리고, 새벽에 깬 뒤 겨우 잠들었지만 한 두시간 뒤 또 겨우 일어나 또 꾸역꾸역 러닝을 나갔다. 일과 사람에 치여 숨이 막히고 뒷목이 뻣뻣해지는 회사 생활이었지만 내가 좋아하는 작가의 책을 번역하며 소소하게나마 기뻐하고 그 틈으로 숨을 쉬었다.
우울 에피소드가 지독하게 찾아왔었던 그 시기는 언뜻 보면 매일이 지옥같아 스스로 삶이라는 스위치를 어떻게 끌 수 있을지만 고민하고 지냈을 뿐이었던 것 같지만 촘촘히 들여다보면 나는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 그 시간을 버텨냈다. 죽고 싶은만큼 살고 싶었나보다. 그때의 나에게 참 대견하고 자랑스럽다고 말해주고 싶다.
그림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고 해도 얇지 않았던 책 한권을 다 번역하고 난 뒤, 2가지를 얻었다.
하나는 이제 원서를 편안히 읽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자신감을 얻었다. 자격증 수료를 위해 공부했을 때도 과제 등으로 많은 아티클을 읽었었지만, 정치, 경제, 국제 정세 등의 쉽지 않은 주제였다. 때문에 읽긴 읽었어도 내용에 공감하고 흥미를 느끼긴 어려웠었다. 하지만 내가 흥미를 가진 분야를 아티클이 아닌 책으로, 그것도 번역한다고 꼼꼼히 꿀떡꿀떡 읽어내려가 보니 이전보다 원서를 향한 허들이 조금 낮아졌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또 같은 내용이라도 한글 번역본 보다 원서가 훨~씬 재밌다는 걸 깨달았다. 아마도 번역을 하는 과정에서 많은 독자들을 이해시키기 위해 다양한 의역이 들어갔기 때문이겠지만, 원서를 읽으면서 저자가 원래 하려던 말을 맥락 속에서 알게 되니 뭔가 저자와 더 친해진(?) 느낌이 들었다. 역시 언어는 단순한 기호가 아니다. 번역은 단순히 언어만 바꾼 것 같지만 언어 외적인 많은 요소가 고려되는 작업이기에 결국 또 다른 창작물로 변한다는 걸 느낀다.
원서를 읽는 즐거움을 깨닫고 난 뒤부터 나는 재밌게 읽은 책의 원서가 만일 영어로 되어있다면 원서를 꼭 사서 한번 더 읽어보곤 한다.
어두웠던 시간, 책을 한 권 번역하면서 버텼던 시간이 끝나고 나는 다시 심연으로 잠겼다. 지하 10층이 끝인 줄 알았는데 100층, 200층 계속 아래로 내려갔다. 코로나가 겹치면서 상태가 더 심각해져서 다시 상담 선생님을 찾아갔고 약 6개월간의 상담을 통해 차츰 수면으로 올라올 수 있었다. 수면으로 거의 올라왔을 때 쯤, 한 브랜드 지원으로 시각장애러너와 가이드러너를 위한 프로그램 운영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이 브랜드는 북미에 본사를 두고 있었고, 나는 프로그램 책임자로서 직접 기획서도 내고 메일, 줌 미팅 등 커뮤니케이션도 직접해야 했다. 실전이었다.
맨 처음에 냈던 기획서를 지금 보면....... 진짜 엉망진창이다. 내가 썼지만 어디 내놓기 정말 부끄러운 수준... 그래서 그때도 행여 나의 부족한 커뮤니케이션이 프로그램에 누가 될까 싶어 열심히 공부하고 원서 읽고, 아티클 읽어가면서 표현 익히려고 나름 틈틈이 공부했었다. 3회에 걸쳐 기획서를 작성했는데 세번째 기획서를 작성할 때 쯤엔 어느 정도의 윤문이 가능한 수준이 되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2년이었다. 결국 3년 차에 접어들지 못하고 지원금만 받아놓은 채 프로그램에 대한 책임을 내려놓기로 결정한 뒤, 본사에 사임 의사를 밝히는 메일을 쓰게 되었다.
많이 아프고 현타가 세게 왔던 시간이었지만 그래도 나 영어는 진짜 많이 늘었다며 스스로를 위로했던 기억이 난다. 그렇다고 해서 그저 위로에만 그치는 것은 아니었다. 마지막 메일을 쓰면서 '나 정말 영어 엄청나게 많이 늘었다'고 생각하며 감탄할 정도였으니... (메일은 사임의 이유를 자세히 설명하는 나름 진지한 내용을 담고 있었기에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가장 어렵고 무거운 표현과 용어를 때려 넣었었다.)
회사를 다니면서 느꼈던 어려움에 대한 회피이자, 뭐 어떻게 쓰일지도 모르고 그저 이왕하는거 더 잘하고 싶어서 시작했던 통번역 공부였지만 그때 그 공부를 해놓지 않았으면 이렇게 미국에서 지원금을 몇차례에 걸쳐 받을 용기를 내지도 못했을거다. 당시엔 큰 의미가 없어보이는 노력도 쌓이면 언젠가 날아오는 기회를 잡을 수 있는 악력이자 근육이 된다는 것을 깨닫는다.
2023년 12월에 그렇게 모든 것이 끝이 나고, 2024년 한 해를 정신 없이 보냈다. 어디에도 적을 두지 않은 채 그냥 내가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진행한 것에 이어 단체를 만들고, 크라우드 펀딩을 한다고 머리를 짜내 스토리를 정리하고 리워드도 만들고... 난생 처음 수술(시술)이라는 것도 겪어보고 입원도 해보고.... 결국 퇴사를 결정하기까지... 참 고생 많았다.
한 서너달 먹고 자고 운동하고 하면서 푹 쉬었더니 이제 또 뭐하지?라는 생각이 들면서... 요즘엔 줌으로 영어 과외를 하고 있다. 목표는 내가 하고 있는 일을 영어로도 충분히 설명할 수 있는 정도의 수준 만들기. 추상적이지만 영어로 설명을 잘 할수 있으려면 일단 내 머릿속에 많은 개념과 내용들이 잘 정리되는게 먼저라는 생각이 든다.
이번에 하는 공부는 나를 또 어디로 데려가게 될까. 궁금하고. 설레고. 이 시간도 켜켜히 쌓이고 있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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