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이드런프로젝트

나는 어쩌다 가이드런프로젝트를 만들었을까

nicole10 2025. 4. 2. 20:24

2024년 3월,

소속도 없이 10주간 진행했던 동계 프로그램이 끝나고 진공상태에 놓였다.

 

그 때 난 풀코스를 제대로 준비도 하지 못한 채 2024 서울마라톤을 어찌저찌 완주했고, 이후 오른쪽 장경인대의 강한 보이콧으로 고생하고 있었으며 2023년 12월부터 미뤄온 수술도 앞두고 있었다. 프로그램이랑 서울마라톤 끝나고 생각하자며 미뤄온 결정의 순간을 더 이상 피할 수 없을 때 나의 신체는 이렇게 너덜거렸다.

 

당시 눈에 보이는 상황은 이랬다.

2024년 10주 동계 프로그램에 펀딩에 이어 2차 펀딩 제안이 있었다. 그리고 펀더는 마음 속에 이미 그리고 있는 (하고 싶은) 프로그램이 있었다. 나에게 부담을 주려는 의도는 전혀 아니었겠지만, 그리고 어쩌면 이 꺼져가는 불씨를 지피기 위해 자비를 들여가며 나의 등을 밀어주고 있는 이 상황은 정말 감사해야만 했지만, 제안하셨던 프로그램은 가이드러너로서 공감하기 어려운 부분이 너무 많았다. 그렇지만 한편으로 이 펀드가 없으면 지금껏 같은 가치를 보며 형성되어 온 커뮤니티가 공중에 분해될 것 같아 두렵기도 했다. 우리를 지키기 위한 다른 방법은 없어보였으나 내 마음이 너무 어려웠다. 애정했던 단체와 아픈 이별을 한지 4개월도 채 되지 않았는데 다시 궁지에 몰린 기분이었다. 하지만 거절해야 할 충분한 이유를 찾지 못한데다가 확신이 없었지만 딱히 다른 대안도 없었기에 눈 앞에 놓여진 상황에 따라 일단 꾸역꾸역 다음 프로그램을 준비했던 것 같다.

 

매 순간이 스트레스였다. 마치 브레이크와 엑셀이 함께 밟힌 자동차가 된 기분이었다.

 

수술 예정일을 며칠 앞두고 나는 드디어 폭발해버렸다. 자세하게 쓰진 못하겠지만 이렇게 계속하다간 간신히 잡고있는 이성의 끈이 몽땅 끊어질 것 같았다. 상을 엎기로 결정하고 난 뒤, 펀딩 제안을 주신 분께 프로그램 제안에 대한 나의 솔직한 생각과 현재 내가 느끼는 마음 등을  휘갈겨내려간 장문의 메시지로 전달했다. 그렇게 엎어버리고 어떤 회신도 받지 못한 채 며칠이 지나고 나는 수술방에 들어가게 되었다. 수술을 마치고 회복을 하면서 현타가 오기 시작했다. 다 쏟아내고 나니 마음은 후련했지만 한편으로 너무 날 것의 말들을 쏟아낸 것 같았다. 어쩌자고 난 그렇게 질러버린 것인가.

양 팔이 다 천자금지가 되어 링거를 다리에 꽂았다 ❘ 태어나 처음 맞아보는 다리 수액줄 - 왼쪽 다리는 실패하고 오른쪽 다리로 성공 ❘ 병원밥이 진짜 맛있었다. 곤약장조림 아직도 생각남.

 

약 일주일정도 지났을까. 회신이 왔다. 펀딩 제안을 철회하겠다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나의 소명을 지지하므로 향후 프로그램 기획이나 운영 단계에서 도울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얼마든지 지원하겠다고 하셨다. 이 결정을 하기까지 얼마나 고민하셨을까. 진짜진짜 정말정말 죄송하고 감사했다.

 

동시에 이상한 해방감이 느껴졌다. 정말 이상했다. 내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었던 안개가 걷히고 있었다.

 

퇴근길에 갑자기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현재는 3월 말, 가을 메이저 대회는 11월 초. 하계 프로그램을 준비한다면 7월이나 8월에 시작해야 한다. 그렇다면 그 프로그램을 위한 운영비 마련 방안은?

 

단체를 만들어야겠다.

 

2024년 1~3월 진행했던 동계 프로그램은 운영의 형체가 없었다. 그저 '장지은'이 그동안 함께했던 운영진, 코치진과 함께 프로그램을 만든다는게 전부였다. 그도 그럴 것이 이는 긴 인연을 마무리하고 이제 좀 쉬려나하고 들이마신 호흡을 채 내밷기도 전에 갑자기 준비하게 되었던, 어떤 관성에 의해서 진행'된' 프로그램이었기 때문이다. 이제와서 말하지만 정말 '뇌가 튀겨졌다(brain-fried)'는 표현을 체감하면서 생각이라는걸 깊이 할 여유도 에너지도 없었다. 정말 정신없이 만들고 운영하고 마무리했던 시간이었다.

 

사실 그래서 나는 많은 기대를 하지 않았다. 상처받고 싶지 않았으니까. 몇 명이 모일진 모르지만 시각장애러너 한 명이 모이더라도 그냥 10주만 해보자라는 마음이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많은 분들이 함께해주셨다. 물론 이건 나의 영향력이라기 보단, 당시 어려웠던 상황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함께 해주셨던 승현씨, 정호님, 그리고 런콥 코치진과 맺은 유대로 큰 힘이 실렸던 프로그램의 공신력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래도 이를 책임지고 운영하는 것은 나였다. 잘잘못을 떠나서 갈등에 휘말렸던 인물이었라는 사실이 누군가에겐 신뢰하지 못할 이유가 될 법도 한데 많은 참가자 분들은 내가 처한 상황이나 '나'라는 인간의 됨됨이를 판단하시기보다 내가 행동하는 가치에 마음을 합해주셨다. (저 한명 한명 다 기억해요. 영원히 감사를 잊지 않겠습니다. 🙏🏻) 

 

무사히 프로그램을 마쳤지만 참가자들 입장에서 아쉬운 부분도 분명히 있었을거다. 하지만 정신없고 바빴다는 변명을 귀엽게 봐줄 수 있는 건 처음 한번이면 충분했다. 미숙함이 반복되면 능력의 부족이 되니까. 나 또한 이미 마음이 '고'하기로 기울어졌으니 이왕 믿어주셨던 분들과 계속 함께할꺼라면 이젠 좀 더 준비되고 책임있는 모습으로 보답하는게 예의라고 생각했다.

 

2024년 4월, 나는 비영리 (임의)단체를 만들었다. 이름은 가이드런프로젝트. 형체없이 프로그램 만들 때 가제로 지었던 '가이드런'에서 조금 더 명확하게 우리를 표현하고자 길이를 좀 늘려보았다. 사실 그냥 더 멋져보이고 싶었다..😉

 

단체의 정관을 만들고 단체의 목적을 정리하면서 이제 진짜 내 두발로 서야 할때가 왔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꼈던 것 같다.

가이드런프로젝트 정관 제 1장 총칙
제2조 (목적) 이 단체는 운동이라는 수단을 통해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함의 가치를 바탕으로 같이 성취를 이루어감으로서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를 몸소 익히고 깨달아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데 일조함을 목적으로 한다.

 

당시 나는 아빠 서재에서 뽑아온 '좋은 기업을 넘어 위대한 기업으로(Good to Great, Jim Collins)'라는 책을 읽고 있었다. 단체를 만든 뒤 이제 어떻게 해야하나? 하고 막막하던 무렵 읽게 된 책이었는데 거기서 '플라이휠 효과'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크고 육중한 금속 원판인 플라이 휠은 처음엔 움직이는 것 조차 큰 힘이 들 정도로 무겁지만, 계속해서 일관된 방향으로 밀게 되면 언젠가 추진력이 생겨 스스로 돌아가는 힘을 발휘하게 되고, 그 힘이 축적을 이루게 되면 언젠가 혁신을 이루어낸다는 개념이었다.

플라이휠 효과 ❘ 짐 콜린스, 좋은기업에서 위대한 기업으로

 

사실 난 이 책을 그 전에도 몇번 읽었었는데, 이번엔 새롭게 다가왔다. 그 전에 읽었을 땐 그저 그 중요성에 대해 공감하는 정도였는데, 새롭게 시작하는 비영리 단체로써 이제 이 이론을 실현시켜 볼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이다. 두근두근. 마음이 정말 설렜다.

 

짐 콜린스는 또한 이 책에서 "규율"의 중요성에 대해 계속 설명한다. 그러고 보니 우리에겐 추상적인 회칙은 있어도, 몇 년 간 호흡을 맞춘 덕에 생긴 "느낌아니까" 식으로 진행되는 암묵적인 운영의 방식은 있어도 명확히 기재된 행동 양식이 없었다. 나는 우리가 앞으로 나아갈 때 단체 차원에서 반드시 고려해야하는 "기준"이 있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지난 6년이 넘는 시간 동안 가이드러너로서 시각장애러너와 함께하면서 내가 느꼈던 우리의 특수한 관계라던지, 아쉬웠던 부분 등을 고려해서 가이드런프로젝트의 가치(기준)을 아래와 같이 정의했다.

 

#팀스포츠로서의 달리기(Running as one team)

나는 우리 단체가 시각장애인만을 위한 혹은 시각장애인을 돕는 비장애인 가이드러너만을 위한 곳이 아닌,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연합하여 "팀으로써" 성취를 이루어 나가는 곳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때문에 함께 달릴 때 분명히 각자의 역할이 부여되긴 하겠지만 그것이 역할의 경중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므로, 하나의 목표를 함께 성취해나가는 팀원으로서 파트너의 존재에 감사하는 것을 첫번째 기준으로 삼기로 했다.

 

#커뮤니티주도적(Community-driven)

또한 나는 우리가 어떤 결정을 하던지 주인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비영리 단체이다 보니, 외부 지원에 의존하기 쉬운 환경이 조성된다. 하지만 다년간의 경험을 통해, 지원은 지원일 뿐 아무리 많은 지원이 있어도 그것을 담는 그릇이 튼튼하지 못하다면 그 모든 자원이 쉽게 낭비될 수 있다는 것을 배울 수 있었다. 때문에 미래에 쏟아질(?) 다양한 후원과 지원을 위해선 그것을 담기 위한 가이드런프로젝트의 그릇을 튼튼하게 만드는게 먼저일 것이다. 나는 어떠한 지원 없더라도 우리 커뮤니티가 스스로 프로그램을 만들고 운영할 수 있는 역량을 먼저 갖추는 것이 그릇을 튼튼하게 만드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좋은 보약도 몸이 받을 준비가 되지 않았다면 탈이 나기 마련이니까. 몸부터 튼튼하게.

 

#지속가능성(Sustainability)

러너라면 오버페이스로 달리는 것이 완주에 있어서 얼마나 소모적인 방식인지 알 것이다. 위에서 말한 플라이휠을 돌리기 위해서는 추진력, 힘의 축적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축적을 위해선 지속적으로 나아갈 수 있는 지구력과 시간이 필요하다. 때문에 축적이 혁신으로 이어지기 위해선 지속가능한 방법으로 결정하고 행동하는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 가치는 넓은 범위를 아우른다. 파트너를 대하는 방법부터, 프로그램 운영 방식, 외부 지원과 관련된 협의까지. 무엇을 결정하기 힘들 때 지속가능성 여부에 기준을 놓는다면 훨씬 옵션이 줄어들 것이다.

 

위의 가치, 규율은 앞으로 계속 개선을 거듭하며 더욱 뾰족하게 만들어보려고 한다. 우리의 플라이휠이 부디 '파멸의 올가미'에 빠지지 않고 축적의 힘으로 혁신을 이룰 수 있기를.

 

이렇게 기준을 세우고 나니, 이제 다음 스텝이 기다리고 있었다. 가이드런프로젝트의 첫 공식 프로그램을 준비할 때가 된 것이다.